잊혀지면 안될 범죄사건

개구리소년 미제사건.. 범인은 누구인가? 현재까지 알려진 것

범죄기록자 2025. 10. 12. 11:14
반응형

개구리소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이들

 

1991년 3월 26일,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이 발생했다. 대구 달서구 와룡산 인근에서 초등학생 5명이 도롱뇽 알을 잡으러 간다고 나갔다가 실종된 사건이다. 아이들은 ‘개구리 잡으러 간다’고 했다는 전국적으로는 ‘개구리소년’으로 불렸고 실제로는 도롱뇽알을 잡으러 간다고 알려졌다. 그렇게 가족·이웃·경찰·군까지 대대적 수색 시작. 초기엔 유괴·조난 등 여러 가능성 제기 되었고 전국적 수색이 이어졌지만 오랫동안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



대구 성서국민학교 재학생 우철원, 조호연, 김영규, 박찬인, 김종식, 김태룡 총6명의 어린이들이 조호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조호연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럽다고 다른곳가서 놀라고 말하였다. 이 후 여섯 아이들은 깡통과 막대기를 가지고 인근 와룡산으로 향했다. 6명 중 김태룡은 같이 따라가다가 “너무 멀리 나가서 놀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을 떠올리곤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와룡산 용강서원 뒤편 도롱뇽알 (영남일보출처)


조호연의 형 조무연(당시 중학교 1학년)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서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라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던 김순남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목격했다. 김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을 마주치며 지나갔다. 그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등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과 같은 반 학생이었던 김경열, 이태석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우철원 군이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와룡산 기슭에 살던 김이수 아주머니는 "14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함승훈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아파트에서 살던 그는 이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가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다고한다.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 이라고 진술했다. 훗날 성인이 된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밝혔다.

함승훈은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쯤에 김종식의 어머니 허도선 씨와 김영규의 어머니 최경희 씨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함께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 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19시 50분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서구 중리동에 위치했던 가축 도살장(現 퀸스로드 쇼핑몰)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 걸 목격했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하고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수사 방향을 이상한쪽으로 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섯 아이들이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 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으며 더구나 실종된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이던 우철원 군이 13세, 나머지 3명은 10~12살이라 10대 초반밖에 안되고, 심지어 막내인 김종식 군은 10살도 안된 9살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집단 가출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남은 유력한 가능성은 유괴 아니면 가출인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일단 유괴범으로부터 오는 협박 전화가 없었고 애초에 돈을 노린 유괴면 한명을 납치하지, 5명이나 납치하는 건 말이 안됐다. 그리고 만약 개인이 아니라 앵벌이 조직의 짓이라면 굳이 외딴 마을에 찾아와 아이 5명을 납치할 가능성도 낮았다. 번잡한 도시라면 아이 1명이 갑자기 사라져도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이 얼마 살지 않던 시골 마을에서는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당시 시골에는 '골목대장'의 말을 부모님의 말보다 더 듣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초등학교 6학년의 말이라면 아이들이 이끌려 갈 수도 있기에 호기심에 타지에 놀러갔다가 범죄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추측에 초기 수사 방향이 정해졌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정체불명 살인마가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누구도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다.

‘대구성서초등학교 실종 사건‘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5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인력이 부족해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개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되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건이나 됐지만 찾을 수 없었다.

ㅊㅐ널에채널에이 출처

 

1996년. 한 교수로부터 아이들은 산속에서 실종된게 아닌 김종식의 아버지인 김철규씨가 아이들을 죽여 집안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교수의 말을 믿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안과 화장실, 부엌 등 바닥을 파내 봤으나 아무런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실종자 가족들에게 더 씁쓸한 아픔을 주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6/nwdesk/article/1966385_30711.html

 

대구 개구리소년 암매장 주장한 김가원 교수 불구속 입건[김은주]

대구 개구리소년 암매장 주장한 김가원 교수 불구속 입건[김은주]

imnews.imbc.com

 

교수는 사체발굴소동으로 인해 한국 최고의 연구기관에 불명예를 남긴 도덕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 후 한국심리학회에서도 제명당했다. 이 후 교수는 개구리소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아이들(2011년)을 관람 후 인터뷰를 통해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그 참담한 일을 당한 유가족 부모님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유가족 여러분들에게 끝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오판했던 점에 대해서 죄스럽게 생각한다"며 과거 자신의 과오에 대해 깊은 사죄의 뜻을 밝혔다.

 

경북 구미에선 목격 제보가 들어왔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됐다는 등의 제보도 나왔으나 찾지 못했으며 사건이 워낙 유명해진 탓에 허위제보도 잇따랐는데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놔라" 같은 장난전화도 빗발쳤고 자기가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면서 부모를 놀리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상 증세를 앓던 어린이가 "내가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떼를 쓰며 난동을 부리거나 심지어 부모가 자녀에게 장난전화를 시키기도 하는 등 수사에 혼선이 생겼다.

아이들이 혹시 마을 저수지에 빠져 죽었을 가능성도 있어 경찰들이 양수기로 저수지의 물을 빼내 보기도 했고, 전국 각지에서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도 조사했으며 심지어 외딴 섬이나 무인도에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유언비어도 퍼져서 경찰들이 그런 섬들까지 다 찾아다니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했다.

 


다섯 아버지들은 직접 트럭을 한 대 마련해 현업을 포기하고 모두함께 전국을 헤매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다녔다. 다행히 이 사건의 해결을 바라는 전 국민의 강력한 지지 덕분에 많은 기업들도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해 도움을 주었다. 전화카드, 담배갑, 인기 만화책, 비디오테이프, 우유, 과자 등 갖가지 상품 포장에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광고가 인쇄되었다.


방송국에서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에 관해 심층 분석하여 방영을 하기도 하였다.

무속인 권희석씨는 “증조부가 꿈에 나타나 개구리소년들이 안심동방향에 묻혀있다“고 경찰에 신고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발굴작업을 하였지만 허탕치고 말았다. (98년도 뉴스)

전국적으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결국 찾지 못했다. 영구 미제사건으로 기록되었고 생업을 포기한 채 자식을 찾기위해 전국을 돌던 노력도 허사가 되어갔다.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결국 직접 수색을 포기했다.

출처 연합뉴스


1995년에 경찰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아이들이 자란 후의 얼굴을 예상한 가상 몽타주를 실은 전단을 20,000여장이나 뿌렸다. 1996년에는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 관련 업무를 달서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 넘김에 따라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다.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 진술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약 10년 후.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났고 그해 10월 22일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건 이후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던 모습과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 인터뷰에 응했던 모습을 보면 본래 그는 매우 건장한 체격이었다. 젊었을 때 유도를 해서 매우 건강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간암에 걸려 죽을 정도로 폭음을 했으니 아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알 수 있다.

2002년.. 유골이 발견되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02/nwdesk/article/1895849_30761.html

 

대구 와룡산 세방골 실종 개구리 소년 유골 발굴 현장[조재한]

 

imnews.imbc.com

 

출처 연합뉴스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가던 시민 오우근씨에 의해 와룡산 기슭에서 실종자들 유골을 발견되었다. 11년 6개월 만이었다. 발견 장소는 사건 당시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했되었다. 실종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하였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여 벌어진 실책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 실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라갔다는 제보가 잇따르면서 유탄에 의한 타살이 아닌가? 추정하였다.

발굴 이틀 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경찰들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대구달서경찰서는 유골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 경찰은 무슨 의도였는지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쳐서 현장을 훼손시켰다. 또 정확한 부검도, 현장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파헤쳐낸 유골만 봤으면서도 "상식적으로 봤을 때 타살 흔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거나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출처 일요신문
출처 일요신문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잘못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에 보도된 영상을 보면 의경들이 삽질을 하고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다. 이걸 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의 이윤성 교수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을 정도다. 그래서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이라고 한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만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 후 슬래그를 깨거나 긁어내는 데 사용하는 용접망치로 지목하였지만 kkotukpang’라는 닉네임을 쓴 네티즌 A씨는 네이트판에 ‘나는 개구리소년 사건의 흉기를 알고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적었다.


글 내용은 피해 어린이 두개골 상처 사진을 올린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에서 내가 이 장면을 본 순간 ‘어? 버니어캘리퍼스잖아’라고 자동반사적으로 튀어 나왔다.

 

당연히 그알에서도 흉기도 찾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자꾸 용접 망치래. 살면서 망치 한 번도 안 휘둘러 봤다. 초등학생 그 연한 두개골을 망치로? 망치로 때리는데 두개골에 파인 자국만 나냐? 심지어 (상처가) 한 개도 아니고 저렇게 여러개가? 망치가 아니지 바보들인가”라고 적었다. 이어 네이트판에 자신이 범인인 것처럼 쓴 댓글도 적혀있었다.


유골이 발견된 이 후 유골 5구에서 상당수의 치아와 머리카락, 손.발톱등이 발견되지 않아 '사망장소와 유골발견 지점이 다를 수 있다'는 타살의혹 제기되었다. 경북대 법의학팀(단장 곽정식 경북대 교수)에 따르면 와룡산에서 발굴된 유골 5구의 복원작업을 벌이던 중 이들 유골의 치아가 상당수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일반적으로 치아는 부패 속도가 느려 땅속에서는 수십년이 지나도 잘 썩지 않으며 빗물 등에도 쉽게 쓸려 내려가지 않는다. 이에 따라 개구리 소년들이 제3의 장소에서 숨진 뒤 옮겨지는 과정에서 치아가유실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머리카락이 발견되지 않은 점도 '타살의혹'을 뒷받침했다.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다.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결국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수사가 가능한 경우도 존재하긴 하지만 범인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가 없어서 수사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잡힐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사건 발생 후 34년의 세월이 지나 범인은 이미 사망했을 수도 있다. 설령 다른 사건으로 인해 이미 수감되었는데 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와룡산 기슭은 우범지역이었다?

 

개구리소년들이 피살된 와룡산 연못이 있는데 실종신고때도 경찰들이 연못 주위로 탐색을 많이 하였다.

그런데 이 연못에는 88년도에 노끈으로 손발이 이어서 묶여 있는 상태로 2구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묶인 손발은 누가봐도 살인사건이라 보여졌지만 당시 경찰은 모두 자살로 종결시켰다. 89년도에는 당시 50시단 군부대의 각개전투교장 와룡산 인근에서 30대 여성 변사자가 발견되었다. 이사건도 목격자, 단서 하나 없어서 자살로 종결시켰다. 이미 의문의 시신들이 발생한만큼 와룡산은 당시 우범지대로 알려져있던 장소였었다. 군부대의 군인들도 무서워서 연못건너 화장실을 못갔을정도였다고..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365968

 

실종 3년 전에도 결박 변사체 발견

⊙앵커: 개구리 소년 사건 속보입니다. 실종사건이 일어나기 3년 전에도 손발이 묶인 변사체가 발견되는 등...

news.kbs.co.kr

 


 

2021년... 개구리소년 30년이 되는 해에 유골이 발견된 장소로부터 약1km 떨어진 위치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2025년 개구리소년사건이 발생한지 34년이 지났다. 아직까지 범인은 나타나지않았고 아이들의 아버지는 5명 중 3명이 돌아가셨다. 아직까지 개구리소년사건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으로 장기 미제사건상태로 남아있다. 개구리소년사건 피해 부모는 "저희 죽기 전에 꼭 양심선언 부탁드립니다. 이제 얼마 안남았습니다" 범인이 살아있다면 꼭 양심선언해주길 바라고있고 혹여나 범인이 진실을 적은 편지나 쪽지같은게 추모비에 놓여져있나 한번씩 유심히 찾아본다고 한다. 

 

 

반응형